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 (문단 편집) == 수용 대상 == 이 수용소에는 유대인뿐만 아니라 폴란드인, 집시, 러시아인, 프랑스인, 체코인, 네덜란드인 등 나치 독일의 핍박을 받던 약 30여 개국 인종이 수용되었다. 또한 독일인 수용자도 상당수 있었는데, 이들은 주로 중범죄자, 나치당에 반대하던 독일인, 정신장애인, 혼혈[* 친족들 대부분 순혈 독일인인데 외할머니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수용되기도 하는 등 조금이라도 다른 인종과 섞여있다면 수용되었다.], 동성애자, [[여호와의 증인]] 신자[* 나치 독일은 군국주의 국가였는데 여호와의 증인에서는 교리상 군대를 부정한다.], 아나키스트, 사회주의자 등 나치가 보기에 독일 사회에 부정적이라고 판단되는 사람들이었다. [[https://www.reddit.com/r/HistoryPorn/comments/vagg4p/homosexual_prisoners_at_the_concentration_camp_at/|핑크색 삼각형을 붙인 동성애자를 찍은 사진. 1938년.]]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블라덱]][*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 홀로코스트의 생존자이자 아티의 아버지.]: 어느 노인이 있었는데 우리가 점호 받을 때마다 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거야... >(회상) >남자1: 난 저 유태인 놈들과 폴란드 놈들 사이에 있을 수 없어요! __나도 당신들처럼 독일인이란 말이요!__ 난 황제에게서 받은 훈장도 있어요. 내 아들은 군인이구요! >블라덱: 하지만 때리고 비웃기만 했지. >(회상 끝) >[[아트 슈피겔만|아티]][* 아트 슈피겔만. 블라덱의 아들이자 쥐의 작가.]: 그는 정말 독일인이었나요? >블라덱: 누가 알겠니? 독일인 죄수들도 있었으니까... __허나 독일인들에겐 이 친구 역시 유태인이었지!__ >---- >[[쥐: 한 생존자의 이야기|쥐]] 2부 2장 中.[* 한국판 합본 214페이지] 이 사람은 결국 그 자리에서 경비병에게 폭행당해 사망했다고 한다.[* 블라덱은 어느 날 점호에 이 사람이 똑바로 서지 않자 경비병이 그를 끌고 가서 쓰러뜨리고 목을 우악스럽게 밟는 소리를 들었다고 했는데, 가스실로 보낸 것 같다고 하는 등 어떻게 죽었는지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고 했다.] 물론 그 사람이 유대인일 가능성도 있는데, 왜냐하면 '혈통'만 유대인이지 본인의 정체성은 완전히 독일인으로 자리잡은 사례가 '''정말 많았기 때문이다.''' 이는 [[홀로코스트]] 문서에 자세히 나와있다. 심지어 본인은 전혀 숙청 대상이 아니었음에도 자진해서 가족과 함께 이 지옥행을 자처한 사람도 있었다. 어느 독일인 여성은 집시 남성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는데, 남편과 자녀들이 아우슈비츠에 끌려가야 하는 운명에 처하자 자진해서 함께 떠났다고 한다. SS들이 몇 번이나 그녀를 꺼내주려고 했지만 본인이 한사코 거부해서 소용이 없었고, 결국 그녀는 가스실에서 자녀들과 함께 생을 마감했다고 한다. [[파일:오시비엥침 수감자 뱃지.png]] 특별 감시가 필요한 죄수들의 경우 위 표와 같은 삼각형 패치를 죄수복에 달고 다니게끔 했다고 한다. 현재 동성애자를 상징하는 분홍색 역삼각형은 여기서 비롯된 것이다. 또한 위 표의 반 사회분자의 경우 [[집시]]나 [[노숙자]] 같은 이들을 의미한다. 물론 인종이 최우선이기 때문에 이런 독일인들은 피수용자 중에서는 비교적 좋은 처우를 받았다고 한다. 프랑스인 같은 경우에는 적십자에서 소포도 받았다고 했으니. 그런데 그 비교적 좋은 처우의 예를 들자면 (아우슈비츠가 아니라 다하우 노동 수용소의 일이긴 하지만) 독일인 수용자의 주검에서 가죽을 벗기는 것이 금지된 것 정도를 들 수 있다. 다른 인종들 중 깨끗한 등과 가슴을 가진 자, 특히 문신을 한 자는 독극물로 죽여 가죽을 벗겨 무두질해 친위대원들이 자기 장갑이나 실내화, 말 안장을 만들어 쓰거나 핸드백을 만들어 애인에게 선물하거나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출처: 존 캐리의《역사의 원전》''146. 다카우 수용소의 의학 실험(1941~45)/ 프란츠 블라하''] 그 정도가 가장 심한 친위대원은 가죽을 벗겨 악기를 만들기도 했을 정도. 절멸 수용소가 아닌 노동 수용소에서 조차 가죽을 벗겨 치장품을 만든게 발견 되었을 정도니, 절멸 수용소에서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것을 만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다. 이후 소련군이 접근하자 나치 독일은 6만여 명의 수용자들을 서쪽으로 이동시켰고, 수용자들은 한밤중에 소집되어 서쪽으로 죽음의 행진을 했다.[* 생존자인 [[브와디스와프 슈피겔만|블라덱 슈피겔만]]은 당시 수용자들에게 담요 하나와 소시지 하나가 공급되었다고 증언했다. 참고로 이때 블라덱은 매우 운이 없었는데, 블라덱에게는 나치 관리들의 사무실에서 일하던 친구가 하나 있었는데 그 친구는 독일군 측의 분위기를 읽어 소련군의 진격과 아우슈비츠의 소개를 예측했고 블라덱을 포함한 몇몇 유대인들과 모의해 철수가 시작되면 안 쓰는 방에 숨기로 했다고 한다. 그들은 이를 위해 세탁소에서 일하는 친구를 통해 제복을 빼돌렸고, 식료품(배급받던 빵의 반이라고 언급된다.)과 관련 서류까지 다 모았으나 최후의 날 그 친구가 뛰어오며 나치가 이 수용소를 불지른다고 한다고 외치는 바람에 죽음의 행진 최후반 대열에 끼여 수용소를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소련군의 진격 때문에 정신이 없던 관리들은 수용소를 불태우지 않았다.(다만 이는 블라덱이 수용되어 있던 아우슈비츠 이야기이고 비르케나우라 불리던 제2아우슈비츠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그 아우슈비츠도 30%는 파괴되었다고 한다.) 블라덱 일행은 며칠간의 행진 끝에 바이에른의 다하우 노동 수용소에 도착했다고 한다.] 초반에는 낙오하는 자들을 친위대가 사살했으나 눈이 오는 추운 밤 등 악천후가 계속되자 친위대가 굳이 사살하지 않아도 자연스레 약한 사람들은 그대로 쓰러져서 죽거나 걷다가 넘어지면 밟혀 죽었다고 한다. 그렇게 걷다가 가축 수송용 열차에 한 량당 100명씩 실어서 옮기기도 했는데, 엘리 위젤의 증언에 따르면 내리지 못하면 죽는 것이었다고 한다. 열차가 멈췄을 때 겨우 내릴 수 있는 건 100명 중 열댓명에 불과할 정도였다고. 빵과 물 같은 기본적인 식량 배급이 끊기자 곧잘 다툼이 벌어졌고, 아들이 아버지의 음식을 빼앗아 먹고 죽게 내버려 두는 아수라장도 흔하게 벌어졌으나 누구도 그것을 비도덕적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이동시키지 못한 수용자들도 있었으며, 6,000여 명에 달하는 이들은 소련군에 의해 해방되었다. 그리고 소련군이 이들을 해방하러 오기 전 그 끔찍한 수용소에서 어떻게든 무기와 폭탄을 준비해 최후의 저항을 일으켜 성공한 사람들도 있었다. 후술할 [[비톨트 필레츠키]]처럼 자진해서 아우슈비츠에 들어가 3년을 버티고 수용자들에게 식량과 외부 정보를 전달한 인물도 있었다. 소련은 이 수용 시설을 접수한 후 한동안 감옥으로 사용했는데, 아주 운이 나쁜 사람들은 나치에게 수용당한 건물에서 스메르쉬(소련 방첩대)에게 심문을 받은 뒤 원래 있던 곳으로 다시 투옥되었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